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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연지사 동종-일본에서 국보가 되다.

등록인 : 진주문화사랑
조회 : 636
2021.01.31
10:54

진주 연지사 동종-일본에서 국보가 되다.



Q. 오늘은 일본 국보가 된 안타까운 연지사 동종에 대해 이야기 해 주신다고 했는데, 왜 안타까운 연지사 종입니까.

A. 먼저 연지사 동종이란 통일신라시대 때  진주 연지사에 있었던 동으로 만들어진 종을 말합니다. 우리 진주 종인 연지사 동종이 우리 국보가 되어야 하는데 일본국보가 되어 안타깝다는 뜻입니다. 안타깝게도 연지사 종은 현재 우리나라에 없습니다. 

Q. 우리나라에 없다뇨. 일본 국보가 되었으니 일본에 있다는 말씀이죠.
A.예그렇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왜군이 수탈해갔습니다. 오타니 기치류(大谷吉隆)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하가 1593년 6월 29일에 일본의 조구신사(常宮神社)에 봉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쿠이현(福井懸) 쓰루가시(敦賀市)에 있는 조구신사는 ‘스네미야신사’라고도 하는 오타니가(家)의 전래되는 사설 신사(神社)입니다.

Q.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일본이 약탈해 갔다는 말씀이군요
A.예 그렇습니다. 종의 상대(上帶), 유곽(乳廓)과 유곽 사이에 있는 ‘태화 7년 3월 일 청주 연지사(太和七年三月日菁州蓮池寺)’라는 명문으로 미루어 주조 연대와 장소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진주의 지명은 청주(菁州)였습니다. 이동경로는 동해 쪽의 해상로를 통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동해 쪽의 해상로를 통해 쓰루가에서 나고야성으로 물건을 빈번히 실어 나른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Q. 진주에 연지사라는 절은 어디에 있었으며 왜 없어졌나요?

A. 예 예로부터 진주성의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해자(垓子)기능을 하는 대사지(大寺池)라는 큰 연못이 성벽을 따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사(大寺)라는 절이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름의 어떤 큰 절이 있어서 대사라 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 대사지를 일제 강점기인 1909년부터 일본인들이 진주성곽의 돌과 흙으로 연못을 메워 원형을 훼손하고 상업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때 당시 연못가에는 연지사(蓮池寺)라는 절이 있었답니다. 통일 신라시대에 창건된 연지사는 (구)배영 초교와 서쪽 중안초교 동쪽의 구 도립 진주의료원까지 형성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Q. 연지사에 동종이 있었다는 말씀인데, 연지사 동종은 언제 만들어 졌습니까.
A. 연지사 동종은 833년(신라 흥덕왕 8년) 황룡사의 각명화상이 직접 주도(主導)하고 지역민 모두가 합세하여 동으로 종을 주조(鑄造)하여 연지사에 걸어두었습니다. 현재 종을 보면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통일신라 흥덕왕 8년(AD 833년) 3월 진주 연지사에서 종을 만들 때 합해 넣은 쇠는 713정이고 묵은 쇠가 498정이고 더 넣은 쇠가 110정이며 종의 조성을 관장한 화상은 혜명법사, ○○법사이고 상좌는 측충법사이고 도유나(총감독승려)는 법매법사이고 종의 (조성에 관여한) 경촌주는 삼장급○, 주작○○이고 종의 조성을 보고한 사람은 보청군사 용○군사이고 기록한 사람은 삼충사지 행도사지이고 종을 조성한 기술자는 안해○대사 ○○대사이며, 이 때 주를 거느리는 사람은 황룡사의 각명화상이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작 연대를 밝혀 줌으로써 통일신라 9세기 전반의 범종의 양상을 규명하는 가장 확실한 편년 자료가 되고 있으며 883년에 연지사라는 절이 진주에 소재한 사실과 연지사 종은 지방의 지배 계층과 지방 향민들이 집단적으로 시주해 만들었다는 사실 외에도 통일신라시대 이두 문자의 표현을 비롯해 당시 관직의 명칭, 승직의 명칭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연지사 동종을 왜 만들었을까요.
A. 연지사 동종의 명문에 따르면 833년 3월에 연지사 종이 완성돼 연지사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는 이해 봄에 가뭄과 기근이 들어 왕이 사자에게 명하여 백성들을 위무하게 했습니다. 당시 지방에서는 농업 생산의 기반이 취약한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굶어죽거나 산적이 되는 경우도 여러 고을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동요가 심각한 상황에서 진주지역에서도 민심이반이 심하게 일어났으며, 이런 상황을 부처님의 힘을 빌어 타개하고자 연지사 동종이 주조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주조 경위는 좀더 연구를 해 보아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Q 연지사 동종이 일본 국보로 지정될만큼 뛰어난 종입니까.

A. 연지사 동종은 일본에 남아 있는 50여점의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제일 크며 공예품으로의 가치와 역사성이 평가돼 일본교육위원회가 일본중요문화재 제78호로 지정했습니다.
  높이 111㎝, 입지름 66㎝의 그다지 큰 종은 아니지만 종의 모습을 살펴보면, 용뉴(龍鈕)가 수직으로 향하여 종정(鐘頂)에 붙이고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모습입니다. 용생구자설에 의하면 종에 장식되는 용은, 용의 셋째 아들인 포뢰라고 합니다. 포뢰는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져 나가게 합니다. 포뢰는 겁이 너무많아 조금만 무서워도 잘 우는데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고래라고 합니다. 종을 치는 당의 모양을 고래처럼 만들어 종을 치면 포뢰는 고래가 자신을 잡으러 오는 줄 알고 더 크게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종소리가 더 커진다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용통(甬筒)은 3단으로 구성되어 유좌형식(乳座形式)에 연화장식이 둘러지고 연판(蓮瓣)도 다소 형식적으로 둘러지고 있다고 하는데 유좌형식이란 젖 모양을 뜻합니다. 종신 하단에는 2개의 당좌(撞座)와 2구의 비천상(飛天像)이 유곽과 엇갈리게 배치되고 있습니다. 당좌는 자방(子房) 중심에 성광상(星光狀)의 8판중 엽화문을 배치하고 그 화문 둘레에 8개의 연자(蓮子)를 표현하였습니다.
비천상은 신라종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유려하게 조식되었는데 보화형(寶花形) 구름 위에 천의자락을 날리며 무릎을 꿇고 주악하는 모습입니다. 명문은 유곽 사이의 상대에 가깝게 가로 15.6㎝, 세로 8.3㎝의 자리에 양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 보아 833년(흥덕왕 8년)에 제작된 종임을 알 수 있으나 연지사의 소재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은 일본에 전해진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범종이자 언젠가는 돌려받아야 할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입니다.

Q.일본인들이 수탈해간 연지사종을 되찾기 위해 지 진주시민들이 ‘연지사종 반환 국민행동’을 조직해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다는데.

A. 연지사 종 반환 국민행동은 지난 2007년 10월 개천예술제 때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일본 국보 제78호로 지정된 진주 연지사종을 되찾는 선언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 함락으로 장렬히 주검으로 산화된 7만 민관군의 진혼제례를 지낸 것으로 시작돼 연지사 종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습니다.
이어 2008년 7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진주 연지사종의 문화재적 가치 재조명과 역사적 고찰’을 주제로 학술발표와 창립 발기인 첫 모임을 가졌고 대표단들이 2차례에 걸쳐 연지사종을 보관하고 있는 일본 후쿠이현 스루가시 스네미야 신사 현지를 답사한 뒤 기행문, 동화, 수필, 희곡, 칼럼 등의 기고와 강연, 방송인터뷰 등을 통해 잊혀진 역사성의 재발견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이같은 활동들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Q. 일본으로 간 연지사 동종을 반환하기 위해 시민들이 단체를 만들어 지금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군요. 강박사께서는 지난 2005년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반환운동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연지사 동종 반환 어떻게 하면 될까요.

A.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2005년 11월 일본 도쿄 고서적 경매에서 처음 알려졌고, 진주시민들과 국민들의 성금을 통해 2006년 7월 환수되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476호로 지정,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김시민 장군 공신 교서는 당시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주도하여 반환운동을 벌였습니다. 물론 모 방송국의 문화재 반환운동 캠페인이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아마도 해외 문화재를 국민들의 힘으로 반환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시민장군 공신교서와 연지사 동종은 둘다 약탈된 문화재이지만, 사정을 확연하게 다릅니다. 김시민장군 공신 교서는 일본 고서적 경매에 나온 문화재로 우리가 적정한 가격을 치르고 환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지사 동종은 일본 국보입니다.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시민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현재 일본에 보관중인 연지사 동종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조선 종일지 모르지만 우리 진주시민들은 우리 조상들의 숨결과 바람이 담긴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환수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려시대 전국 8대 도시 진주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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